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2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 (문단 편집) === 이스라엘의 독립까지 ===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악감정은 예전부터 누적되어져 왔었다. [[로마 제국]]의 1차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시작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제한되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해당 지역을 고의로 '''팔레스티나 속주'''로 명명하였으며 유대-로마 전쟁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근교 나바테아 일대의 아랍인 보조부대를 동원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들이 [[천주교]] [[교회]]를 후원한[* ㉠ [[갈레리우스]]의 [[https://en.wikipedia.org/wiki/Edict_of_Serdica|세르디카 칙령]]([[정교분리|신앙의 관용을 보장한 칙령]]) ㉡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종교의 자유|신앙의 자유를 공인한 칙령]]) ㉢ [[테오도시우스 1세]]의 [[https://en.wikipedia.org/wiki/Edict_of_Thessalonica|테살로니카 칙령]]([[종교 국가|로마의 국교로 선언한 칙령]]) ] 결과로 팔레스티나 속주 일대의 유대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 소수자로 전락한 시점부터[* 380년대부터 反유대인 폭동들과 국교화 여론에 대응하여 [[로마 원로원]]의 [[로마법]]과 [[로마 황제]]의 [[칙령]]에서 [[반유대주의]] [[법률]]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유대인 정책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은 프랑스 역사학자 [[https://fr.wikipedia.org/wiki/Mireille_Hadas-Lebel|미레유 하다스 르벨]]의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30489|히브리 민족]]을 시군구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에 직접 찾아가 빌려 읽거나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싼 값에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약 1800년간 3개 대륙([[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수시로 박해를 받아왔었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유대인들이 집중거주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당시 해당 지역을 영유하던 러시아 제국의 선동으로 수많은 [[포그롬]]이 빈발했다. 그나마 반유대주의가 덜했던 서유럽에서조차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반유대주의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189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나라를 재건하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및 오스만 제국이 완패하면서 해당국들의 식민지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독립하거나 분할되었고,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분할하여 점령한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 [[아타튀르크]] 정권이 마지막 [[술탄]] 겸 [[칼리파]]를 폐위하는 방식으로 멸망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 연맹]]을 내세워 [[영국령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레바논|프랑스령 시리아]]를 창건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아랍어권 지역들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튀르키예]]의 [[전쟁배상금]]을 탕감했다. 한편 [[반유대주의]] [[선동]]이 [[산불]]처럼 늘어나는 3개 지역([[동유럽]]+[[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에 편승하면서 시온주의를 실현하려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및 [[하이파]]와 [[나사렛]]에 재정착하면서 유대인 공동체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이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대신에 아랍인들의 [[독립국]] 건설을 지지한다고 [[https://en.wikipedia.org/wiki/McMahon%E2%80%93Hussein_Correspondence|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약속했으나, 영국은 이것을 지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고, 그 뒤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그 일대를 나눠먹는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유대 민족의 주권국가 건국을 지지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아랍인 공동체들의 입장에서는 피는 자기들이 흘렸는데 그걸 낼름 줏어먹으려는 도둑놈으로 보이겠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존재한''' 유대인 공동체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영주(중세)|대영주]]인 영국과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의 [[자산]]을 인수한 [[터키 공화국]]에게 허락을 받았고, 자기네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 [[https://en.wikipedia.org/wiki/Jewish_Legion|참전해서]] [[https://en.wikipedia.org/wiki/HeHalutz|많은]] [[https://en.wikipedia.org/wiki/Nili|피를]] [[https://en.wikipedia.org/wiki/Hashomer|흘렸으니]] 당연한 몫이라고 반박했으며, 아랍인들은 하루빨리 [[아라비아 반도]](아랍인 공동체들의 [[고향]])에 돌아가라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및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은 [[https://en.wikipedia.org/wiki/Faisal%E2%80%93Weizmann_Agreement|1919년 1월의 파이살-바이츠만 합의]]와 [[https://en.wikipedia.org/wiki/San_Remo_conference|1920년 4월의 산레모 결의]]와 [[https://en.wikipedia.org/wiki/Cairo_Conference_(1921)|1921년의 카이로 회의]]에 참석하면서 [[갑론을박]]으로 [[논쟁]]하다가 [[https://en.wikipedia.org/wiki/Yishuv|이슈브]](유대교도 [[자치정부]])와 레바논(크리스트교도 자치정부)과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을 출범하는 것으로 매우 어렵게 타협했다. [* 공교롭게도 유대인 공동체들의 주장은 아타튀르크 정권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로잔 조약]]에 반영했으니, 가까운 미래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및 [[터키]]와 [[이스라엘]]에게 매우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내쫓고 가나안을 다스리기 시작하자, 영국 정부의 허락과 함께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내륙의 [[황무지]]에 재정착하면서 민족 분쟁이 점점 늘었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영국 식민부의 민정청도 본국과 협의하여 이민자를 제한하였고, 현지의 [[아랍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발하면서 [[테러]]와 [[폭동]]이 자주 일어났으니, 이슈브를 구성하는 유대인 공동체들은 [[자치경찰|정착촌경찰]]과 [[향토예비군|민방위군]]을 창설하여 아랍인들의 습격에 맞서 싸웠으며, [[소수민족]] 공동체들([[베두인]]/[[드루즈파]]/[[체르케스인]])과 합작하면서 상호협력했다. [* 영국은 [[지방분권]]형 경찰체제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치안을 유지했는데, 식민부 민정청의 중앙수사국과 3개의 영지경찰(도시/시골/변경) 및 [[영국군|영군]] [[헌병대]]와 이슈브가 운영하는 3개의 정착촌경찰(도시/시골/변경)이 각각 따로 존재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경찰]]은 이슈브 정착촌경찰과 [[유대인]] [[레지스탕스]]와 [[외국]][[군경]] [[경력자]]들을 밑천으로 삼아서 창설한 관청이니, 100년 전의 영지경찰과 전혀 무관하며, [[이스라엘 건국전쟁|일손이 부족해]] [[비정규직|임시로 고용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영지경찰 부역자는]] [[시온주의|이념국가를 지향한 건국영웅들이 보기에는]] 미래의 [[제5열]]로 의심받아 [[숙청|해마다 자격심사로 대부분을 해고했다.]] ] 20세기 초반까지는 유럽에서 가나안 일대로 이주하는 유대인 인구보다는 미국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홀로코스트]]를 겪은 것은 물론, [[이슬람주의]]가 과격화되자 3개 대륙([[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유대주의]] 열풍([[테러]], [[폭동]], [[약탈]], [[학살]])을 피하려고 목숨걸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골에서 의기투합한 유대인 [[민병대]]들이 곳곳에서 봉기했으며, [[연합국]]의 당단군경(黨團軍警)으로 자원입대한 유대인들도 엄청나게 많았고, 이슈브의 [[https://en.wikipedia.org/wiki/Haganah|민방위군]]도 [[위장취업|영군의 일원으로 간판을 바꿔]] [[https://en.wikipedia.org/wiki/Palestine_Regiment|북아프리카와]] [[https://en.wikipedia.org/wiki/Palmach|서아시아와]] [[https://en.wikipedia.org/wiki/Jewish_Parachutists_of_Mandate_Palestine|남유럽의]] [[https://en.wikipedia.org/wiki/Jewish_Brigade|곳곳에서]] [[비시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유대인 공동체들의 조직적인 후원으로 무려 100만명을 헤아리는 유대인 참전용사들이 갑자기 등장했으니, 1945년에 이르러 영국의 정치인들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계속 유지하자고 외칠 만한 구실과 명분이 모두 사라졌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에도 영국은 아랍인 공동체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최종 결정을 연기했으니, 이슈브의 당단군경으로 [[위장취업]]한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은 [[https://en.wikipedia.org/wiki/King_David_Hotel_bombing|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모든 관청들에 대하여 테러와 암살을 강행했고,]] 4년간의 숨바꼭질에서[* 이슈브 산하의 시온주의자 무장조직들 VS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중앙수사국과 영지경찰+[[영국군|영군]]의 [[야전군]]과 [[헌병대]]+[[MI5]] ] 마침내 완패했다고 판단한 영국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하여''' [[유엔 총회]]에 공을 떠넘기고, 철수 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 무장조직들의 폭력투쟁(테러, 폭동, 암살, 습격)이 갑자기 늘어났다. [* [[트란스요르단]](이슬람교도 자치정부)와 이슈브(유대고도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쪽 방면의 아랍인 공동체들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으니, [[아민 알 후세이니]]를 비롯한 [[혹세무민|이슬람주의자 아랍인들이]] 아랍인 공동체를 [[감언이설]]로 선동했고, 영국이 차례로 철수하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면서 [[활빈당]]처럼 신나게 날뛰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슈브의 수뇌부는 [[로잔 조약]]으로 [[그리스인|불온]][[쿠르드인|분자]][[아르메니아인|들을]] 뿌리뽑은 [[터키 독립전쟁|터키의]] [[터키-그리스 인구 교환|경험과]]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의]] [[주데텐란트|경험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커즌 라인|폴란드의]] [[오데르-나이세 선|경험과]] [[겨울전쟁|핀란드의]] [[계속전쟁|경험도]]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영국의 완전철수 직전에 [[뒤통수|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전역에서]] [[제노사이드|비유대인들의 완전소탕을 다짐했다.]] 곧이어 [[이스라엘 건국전쟁]]이 발발하자, 로잔 조약의 수혜국을 자처한 [[흑막|터키와 체코가]] [[악역|이스라엘 진영과 요르단 왕국을]] 협찬했다. ] 1947년에 이르러 [[유엔 총회]]가 유대인 공동체들과 아랍인 공동체들의 생존권 영역을 반으로 나누고 예루살렘은 [[중립지대]]로 남겨두라고 요청했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영토와 국가를 얻을 수 있었고, 아랍인 공동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독립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의 아랍인 나라들은 유엔 총회의 제안에 대해 유럽 열강들의 세력확장으로 보았다.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건국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스라엘 진영이 악전고투 끝에 결국 승전했으니, 아랍인 공동체들에게 할당된 영토의 넓이가 대폭 줄어들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대세]]를 관망한 소수민족 공동체들([[베두인]]/[[드루즈파]]/[[체르케스인]])은 이스라엘 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한 유대인 공동체들과 '''오늘날의 [[연봉협상]]처럼 협의하면서 [[계산기]]를 두들긴 끝에 카멜레온처럼 이스라엘 국민으로 변신했으며,'''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 왕국]]이 점령하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 왕국]]이 점령했으니, 수십년간의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